보호 본능

어떤 생명체든 보호 본능을 갖고 있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특히 나무의 경우 어린 것일수록 강한 보호 본능을 발휘한다. 나무에 가시를 갖고 있는 경우 대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나무 중에서도 음나무(엄나무)는 강한 가시를 갖고 있다. 음나무의 가시는 다른 나무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고 강하다. 아마 조각자나무가 음나무의 가시에 대적할 만하다.
음나무의 가시는 이 나무를 이해하는 주요한 특징이지만, 가시만으로 이 나무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음나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만들지만 죽을 때까지 가시를 지니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시만으로 이 나무의 특징을 이해하려들면 실패한다. 음나무의 경우 나이가 많아지면 줄기의 가시가 사라진다. 음나무가 스스로 가시를 제거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살이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이다. 사람도 성인이 되면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아 살아가는 지혜를 얻듯이, 음나무도 성장과 함께 삶의 지혜를 터득하면서 가시를 제거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큰 음나무를 보기란 쉽지 않다. 음나무는 집 주위에 심어 가지를 잘라 약용으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음나무의 가시는 나무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지만, 인간들도 음나무의 가시를 통해 보호받기를 원했다. 사람들이 집 주변에 음나무를 심은 것은 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대개 음나무처럼 가시를 가지고 있는 나무에 대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邪)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탱자나무를, 유럽에서 산사나무를 울타리로 삼은 것도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음나무의 한자 이름은 ‘자추(刺楸)’ 혹은 ‘엄목(嚴木)’이다. 이 이름도 가시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학명(Kalopanax pictus Nakai)을 붙인 일본의 나카이는 음나무의 특징에 대해 가시를 강조하지 않았다. 학명 중 ‘칼로파낙스(Kalopanax)’는 ‘아름답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칼로스(kalos)’와 ‘인삼 속(屬)’을 의미하는 ‘파낙스(panax)’를 합성한 말이다. 학명에서 아름답다는 것은 이 나무의 갈라진 잎이 규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음나무의 잎은 손바닥처럼 규칙적으로 갈라져 있다. 학명 중 ‘픽투스(pictus)’도 ‘색이 있는’ 혹은 ‘아름답다’는 뜻이다. 음나무에 대한 중국식 이름도 잎을 강조한 게 있다. 중국의 <본초강목(本草綱目)>과 <식물명실도고장편(植物名實圖考長編)>에 나오는 ‘해동(海桐)’, ‘해동피(海桐皮)’도 잎을 강조한 이름이다. 이 같은 이름은 음나무가 오동나무를 닮았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아울러 음나무 이름 중 ‘해(海)’ 자가 들어간 것은 이 나무가 남해(南海) 산골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음나무의 다른 이름인 자추에서도 이 나무의 잎을 강조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자(刺)는 가시를 의미하지만 추(楸)는 개오동과 가래나무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음나무의 잎 모양을 고려하면 개오동을 뜻한다.
나의 고향 집 근처에도 음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해마다 음나무 가지를 톱으로 자른 후 다시 도끼로 잘게 잘라서 닭백숙에 넣은 음식을 아버님께 해드렸다. 그런 덕분인지 평생 동안 술을 즐기신 아버님은 아직도 속이 괜찮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사라졌는지 고향 집 채마밭에는 음나무가 없다. 음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옻나무가 살고 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께서 음나무 대신 옻나무를 심었으리라. 이처럼 한 그루의 나무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와 생명체의 이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인근 구암산 근처의 사찰 앞에도 어린 음나무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음나무를 사진에 담아 책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엔 이제 음나무가 없다. 공사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산에 오르기 전에 늘 보았던, 이곳에서 새순이 올라오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던 음나무가 사라진 뒤, 나는 사찰에 잘 들르지 않는다. 작은 음나무 한 그루지만, 내 마음에 아주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천연기념물 음나무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천연기념물 음나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천연기념물은 창원시 동읍의 천연기념물 제164호다. 이곳의 천연기념물 음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음나무들은 신방초등학교 정문 근처 언덕에 살고 있다.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 그 근처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다. 천연기념물과 함께 살고 있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설령 지금은 어린 학생들이 한 그루의 나무가 갖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잘 모를지라도 몸 속에서 자랄 추억을 생각하면 그 값은 계산할 수조차 없다.
창원의 천연기념물 음나무를 보면 과연 이 나무가 마을 주변에서 보는 음나무일까 싶을 만큼 웅장하다. 더욱이 700살 먹은 이곳의 음나무처럼 오래 살고 있는 음나무에는 당연히 줄기에 가시가 없다. 삶의 지혜도 지혜려니와 나무에서 풍기는 기운 때문에 감히 이 나무를 해칠 수 없기 때문에 구태여 가시를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곳의 음나무는 도로와 산이 만나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관찰하는 데 좀 불편하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관찰하다가 자칫 도로로 떨어질 위험도 높다. 이런 조건 때문에 사진 촬영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다른 장점도 갖고 있다. 도로 쪽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나무의 속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천연기념물이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르지만, 매일 수없이 다니는 차량이 이 나무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나무든 사람이든 생명체는 소음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오래 살 수 없다. 속리산의 정이품송이 차량의 소음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곳의 음나무들도 소음 때문에 무척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가 좀더 격조 높은 문화국가를 지향한다면, 한 그루 천연기념물의 행복한 삶을 위해 기꺼이 도로를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을 중시하는 그런 마음씨를 가진 국가라면 국민들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창원의 천연기념물 음나무는 키도 30m에 이를 만큼 크다. 이곳의 음나무는 처음에는 이보다 많았지만 태풍으로 몇 그루가 사라졌다. 이처럼 한 생명체는 예기치 않는 재난으로 삶을 마감한다. 창원의 천연기념물 음나무는 그런 재난을 잘 견디며 살고 있는 기특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음나무들도 언제 재난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영원토록 이곳의 음나무를 보호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은 정성을 다해 보호할 뿐이다. 정성을 다해 보호하는 이 같은 마음은 결코 음나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음나무를 위해 보호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게을러서 지속적으로 정성을 다할 수 없다. 인간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보호할 때만이, 음나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을 가질 때만이 천수를 누리다 죽는 천연기념물 음나무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에는 700살 먹은 천연기념물 제305호가 살고 있다. 이곳의 음나무는 충청북도 지역 나무 답사 때 만났다. 가족과 함께 했던 충북 여행길에서 음나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만남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길치에 가까운 내가 농촌 한적한 곳에 살고 있는 음나무를 만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몇 차례 길을 묻고 물어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곳 음나무를 만난 시간은 어둑한 저녁이었다. 길을 몇 차례 헤맨 탓에 해가 진 뒤에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음나무를 만나는 순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한 그루의 음나무였지만 그 기운이 엄청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700살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가족들과 손을 잡고 나무 둘레를 재어보았다. 음나무의 기운이 가슴 깊이 엄습했다. 이곳의 음나무는 창원의 음나무처럼 키는 크지 않지만 가지가 사방으로 골고루 뻗어 매우 아름답다. 가족들은 음나무를 안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연기념물을 안고 하늘을 쳐다보면 나무 안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심장에 심은 음나무

한 그루의 천연기념물을 보고 돌아오는 시간만큼 행복한 순간도 드물다. 왜 한 그루의 천연기념물을 보고나면 그 여운이 오래 갈까. 나는 천연기념물을 만나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한다. 700년 동안 살았던 음나무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700년의 세월을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사정상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하면서 음나무가 살았던 세월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돌아오면서도 음나무가 살았던 세월을 상상한다. 내가 음나무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단순히 700년의 음나무 삶이 음나무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원과 충북의 음나무 천연기념물이 살았던 세월은 곧 나의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음나무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나의 삶을 반추하는 것과 같다. 나에게 나무를 보는 것은 단순히 나무를 보고자 하는 게 아니다. 어떤 나무든 나무를 본다는 것은 나를 본다는 것이다. 나무를 통해 나무만 본다면 그렇게 멀리까지 찾아갈 이유가 적을지도 모른다. 불원천리 한 그루의 나무를 찾아 나서는 길은 곧 나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그래서 나무를 보러가는 여정은 구도의 과정이다.
내 마음엔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음나무는 나의 심장 옆에 살고 있다. 이 나무를 보고 오면서 심어 둔 것이다. 내가 음나무를 심장 옆에 심은 것은 이 나무의 기운으로 중심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겉으론 당당한 듯 보이지만 속은 언제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도 식물도 흔들리면서 성장하지만, 자동차 ABS처럼 흔들림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내 마음에는 심장에 심은 천연기념물 음나무 외에도 심장 앞에 은행나무, 쓸개 뒤엔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온통 마음에 나무를 심어 뒀으니 세상에 무엇이 두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