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송이의 비밀

나는 거의 매년 추석 때 고향 창녕의 진산(鎭山) 화왕산(火旺山) 기슭에 위치한 산소를 찾아, 벌초 후 성묘한다. 이곳은 고향 집에서도 차를 타고 10분을 간 후, 걸어서 1시간 정도 올라야 할 만큼 첩첩산중이다. 혼자서는 결코 갈 수 없어 형제들이 동행한다. 벌초 후 성묘하는 것도 벌초하러 따로 갈 수 없어 한꺼번에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길을 표시하지만 한 번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칡으로 뒤엉킨 산속을 뚫고 묘소를 제대로 찾아가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묘 길이 즐거운 것은 오랜만에 형제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고, 더욱이 돌아오는 길에 거의 어김없이 밤을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입구에 밤나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몇 그루만 해도 적지 않은 밤을 얻을 수 있다. 밤송이가 벌어진 경우에는 쉽게 밤알을 챙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여차하면 가시에 찔려 피가 난다. 밤송이는 식물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栗刺〕를 달고 있다. 왜 밤송이는 다른 식물과 달리 강한 가시를 달고 있을까? 어떤 식물이든 가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보호 본능이다. 밤나무가 유독 강력한 가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밤알을 보호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나무의 열매에는 씨방을 보호하는 껍질이 있다. 그러나 밤알은 그렇지 않다. 밤알 전체가 씨방이다 보니 겉의 강력한 가시로 외부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 밤송이는 사람, 짐승, 새를 막론하고 그 누구의 침입에도 방어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밤알을 얻기 위해 밤송이에 혹 찔리더라도 원망 따위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밤나무의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이기 때문이다.


밤을 제사에 올리는 이유

밤나무가 흔하지 않았던 고향인지라 성묘 길에서 줍거나 따온 밤을 간혹 제사에 올리기도 한다. 밤은 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수음식이다. 밤을 제사에 올리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제사는 조상을 위한 의식이기 때문에 제수용품도 조상을 위한, 이른바 ‘위선(爲先)’이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워 내면서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지만, 밤나무는 그 반대로 종자의 껍질이 뿌리가 내려가고 줄기가 올라오는 경계 부근에 아주 오랫동안 달려 있다.
밤나무의 이러한 특징을 곧 선조를 잊지 않는 존재로 받아들여 제사에 올리는 것이다. 아울러 밤은 대추와 더불어 자식과 부귀를 상징한다. 그래서 혼례에 밤이 빠지지 않는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논어(論語)』에 따르면, 중국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들었다. 율주(栗主)라 부르는 밤나무로 만든 신주는 가시와 무관하지 않다. 신은 언제나 삼가야 하고, 조심스럽게 공경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밤송이의 가시는 사람들을 공경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전율(戰慄)’의 의미도 가시 달린 밤송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사 때 ‘조동율서(棗東栗西)’에서 보듯 밤은 서쪽에, 대추는 동쪽에 둔다. 이는 붉은 것은 동쪽에, 흰 것은 서쪽에 두는 ‘홍동백서(紅東白西)’에 따른 것이다. 밤은 겉은 갈색이지만 깎으면 흰색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비롯한 각종 의식에서 식물의 특성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증보산림경제』에는 밤나무 심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밤은 한 톨에 세 개 들어 있는 것이 좋으니,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골라 심는다. 양쪽 가장자리에 있는 밤이나 한 송이에 한 개가 들어 있는 것을 심으면 한 송이에 한 개가 들어 있는 밤만 열린다. 처음 밤을 심을 때 땅을 파서 오지그릇을 깔고 흙으로 그 위를 메우고 심으면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옮겨심기에 편하다. 가을과 겨울 사이 구덩이를 만들어 거름을 깔아놓고 흙으로 덮어서 표시해 두고 이듬해 봄에 구덩이 속에 옮겨 심으면 잘 살고 쉽게 자란다.’
지볼트(Siebold)와 주카리니(Zuccarini)가 붙인 밤나무의 학명에서도 밤송이를 강조하고 있다. 학명 중 속명인 ‘카스타네아(Castanea)’는 ‘밤’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스타나(castana)’에서 유래했다. 학명 중 종소명인 ‘크레나타(crenata)’는 ‘톱니가 있는’의 뜻이다. 이는 밤나무의 잎을 강조한 것이다. 갈잎 키 큰 나무인 밤나무의 잎은 상수리나무 잎과 유사하다. 같은 참나뭇과라는 점을 알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황식품

식용할 수 있는 밤나무는 대개 40여 종이다. 그 중에서도 주로 재배하는 것은 구주율(歐洲栗), 북미율(北美栗), 일본율(日本栗), 판율(板栗: 中國栗) 등 4종 정도이고, 유럽, 북미, 일본과 한국,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이 중 판율이 전체 재배 면적의 80%를 차지한다. 중국 밤나무의 재배역사는 북경 원인(猿人)이 발견된 주구점(周口店)에서 화석이 나왔을 정도로 오래다. 그래서 『시경』을 비롯해 중국 사료에 밤나무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처럼 오랜 재배 역사를 지닌 만큼 밤나무는 일찍부터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장자(莊子)』 외편 『도척(盜拓)』편에서 그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옛날에는 짐승이 많고 사람이 적었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나무 위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짐승의 공격을 피했다. 낮에는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유소씨(有巢氏)의 백성이라 불렀다.’
밤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우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1932년 경 홍군(紅軍)은 국민당에게 쫓기면서 군량미가 부족하자 밤을 통해 군량미를 충당했다. 항일전쟁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밤은 구황식품으로 아주 높게 평가했다. 특히 북위(北魏)시대에 나온 중국은 물론 세계 최초의 종합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동이(東夷)에서 나는 큰 밤이 배처럼 크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밤도 일찍부터 유명세를 얻고 있었던 듯하다.
밤이 열리려면 꽃이 피어야 한다. 밤나무의 꽃은 진한 향기로 유명하다. 밤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다. 육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게 수꽃이고, 암꽃은 수꽃의 꽃차례 바로 밑에 세 개씩 달리지만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보기 어렵다. 밤나무는 부모인 참나무를 닮아 목재 가치도 아주 높다. 밤나무는 서양에서 포도주통으로 쓰이고,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건축 재료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차량(車輛), 건축, 조선, 가구용으로 많이 활용했다. 밤나무는 목질이 견고하고 광택이 있으며, 충격에도 강하며 쉽게 부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을 가진 밤나무는 중국 춘추시대에 옻나무, 가래나무, 오동나무 등과 더불어 주요한 가로수였다.


원효의 탄생과 밤나무

경상북도가 낳은 인물 중 원효(元曉, 617~686)만큼 비중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승이다. 특히 그는 유학하지 않은 국내파로서 세계 불교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나는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의 탁월한 해석과 식견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파계(破戒)를 통해 요석공주와 결혼해서 위대한 인물인 설총을 낳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다른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파격(破格)의 소유자였다. 나는 원효의 파격정신을 좋아한다. 파격정신이 창의력의 원동력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가 보통사람과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은 탄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효의 탄생 얘기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는 현재의 경산시 압량 밤골 사라수(沙羅樹)에서 태어났다. 사라수에 얽힌 얘기 두 토막.
‘스님의 집안은 원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산통을 느꼈으나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남편이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서 출산하였기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절의 주지가 노비들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노비가 적다고 관청에 고소하니 관리가 괴상히 여기고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를 해보니 밤 한 알이 발우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 때문에 밤골이라 했다. 원효 스님이 출가한 뒤에는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초개사(初開寺)라고 했으며, 사라나무 아래에도 절을 짓고 사라사수(沙羅寺樹)라 불렀다.’


가을 소리, 밤 굽는 소리

어린 시절 학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소먹이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초가을까지 앞산이든 뒷산이든 소를 몰고 가서 소에게 풀을 먹인다. 소가 풀을 뜯는 동안 목동들은 설익은 밤을 따서 구워먹곤 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라 산의 나무 열매는 귀한 식품이었다. 밤나무도 주인이 있는 터라 조심조심 따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에게 들통 나서 등교도 못하고 부모님께 야단맞기 때문이다. 이때 친구들과 밤을 따거나 구워먹는 것은-간혹 이 놀이에 빠져 소를 잃어버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할 때도 있었지만-아주 좋은 놀이였다.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시에서도 나의 유년시절과 비슷한 추억이 묻어난다.

한 줄기 가을빛이 나무 끝에 비추니(一抹秋光到樹頭)
맑은 황색 옅은 녹색 암암리 떠오르네(淡黃輕綠暗相浮)
밤송이에 바람 불어 알밤이 터지고(風吹金蝟 卵)
아이들은 짝지어 좋은 놀이하는구나(閒伴兒童作勝遊)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